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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성사 - 하나인 전례 / 주낙현 신부
신장현 2016-07-09 추천 2 댓글 0 조회 2036

주낙현 신부와 함께 하는 전례 여행


말씀과 성사 - 하나인 전례


‘말씀’과 ‘성사’의 관계에 대해 오해가 크다. 그 대표적인 예는, “개신교는 말씀 중심의 교회, 천주교는 성사 중심의 교회”라는 말이다. 이런 주장에서는 ‘말씀’을 성서 구절이나 설교로, ‘성사’를 영성체나 축성된 성체로 좁게 이해한다. 한편, 성공회는 이 둘의 균형을 훌륭하게 이루고 있다고 짐짓 자신한다. 그런데 그 자신감이 늘 개운치는 않다. 둘 중에 어느 한 쪽으로 명확히 가야 한다는 대범한 주장을 우리 교회 안에서 종종 듣기 때문이다. 다른 교회들이 만들어 놓은 좁은 틀에 우리 자신을 맡겨야 할까?

‘말씀’이란 무엇인가? 성서인가? 설교인가? 그도 아니면 성서를 읽거나 설교를 통해 느껴지는 어떤 감동의 물결인가? 이런 물음에 적어도 성공회는 단순히 ‘예’라고만 대답하지는 않는다.

‘말씀’을 잘 이해할 수 있는 가장 분명한 근거는 창세기와 요한복음에 있다. 하느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다(창세기 1장). 그리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었는데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시다(요한복음 1장). 여기서 ‘말씀’은 성서도 아니요, 설교도 아니요, 우리의 감동도 아니다. ‘말씀’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그 ‘말씀’은 항상 어떤 사건을 일으킨다. 그래서 구약의 모든 사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사건들이 바로 ‘말씀’이다.

‘성사’란 무엇인가? 좁은 이해로는 영성체요, 축성한 성체이지만, 더 넓은 의미에서 살펴야 한다. ‘성사’에 대한 교회의 오랜 정의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에게 보이도록 나타나는 사건”이다. 그 원초적인 성사의 사건은 창조의 은총이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성육신의 은총이었다. ‘말씀’의 사건과 그대로 겹친다. 이 원초적 성사가 오늘 우리에게 계속 일어나는 곳과 때가 바로 성찬례라는 성사이다.

말씀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면 성사에 대한 이해도 빗나간다. 시간이 흐르면서 교회는 말씀의 영역을 머리로 제한하기 시작했다. 여러 학자는 교회가 머리 중심의 그리스 철학과 교류하면서 이런 변화가 있었노라고 말한다. 이 과정에서 말씀과 사건(성사)의 연결이 약해졌다. ‘말씀’을 설교나 교리로 축소하는 일이 생겨났다. 그러자 사람들은 느끼고 만지는 직접적인 경험에 치중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설교보다는, 겉으로 분명히 드러나는 성사의 행동들에 지나친 관심을 둔 것이다. 중세 교회의 극단이다.

16세기 종교개혁은 잊혀졌던 ‘말씀’을 회복하자는 원대한 계획이었다. 그러나 성서와 소위 ‘바른 해석’(교리)에 대한 강박관념이 강했던 것 같다. 그래서 교회의 성사와 전례 안에서 말씀의 위치와 관계를 되살리기보다는, 여전히 성사와 대결하고 성사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는 흐름을 만들었다. 또 다른 극단이다.

성공회는 세 가지 해결책을 시도했다. 첫째, 기도서 전례문을 성서의 근거에 따라 재구성했다. 이를 세례와 성찬례, 그리고 다른 사목적인 성사들에 적용했다. 둘째, 성찬례 안에서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 두 구성 부분이 균형있게 관계하도록 했다. 셋째, 매일기도(성무일도)를 수도자나 성직자뿐만 아니라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되살려서, 공동체 안에서 말씀의 잔치(성서 독서, 찬양, 중보 기도)를 회복하도록 했다.

20세기 교회 일치 운동과 전례 쇄신 운동을 통해서 대부분의 교회는 말씀과 성사에 대해서 좀 더 일치된 이해에 이르렀다. 말씀과 성사는 하나인 전례의 두 축이다. 어느 한 축이라도 빠지면 전례가 뒤뚱거린다. 말씀없는 성사는 없다. 성사는 말씀인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사건이 우리 앞에 눈에 보이도록 드러나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성사없는 말씀도 없다. 말씀은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특정한 형태를 갖고 선포되어야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성사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성찬례의 구조는 그 관계를 잘 드러낸다.

말씀의 전례는 말씀의 선포와 경청이다. 독서(구-신약, 시편, 복음서)는 그 자체로 설교와 대등할 만큼 중요한 말씀 선포의 사건이다. 독서 자체가 말씀 전례의 핵심이다. 이런 점에서 전례 독서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행동을 살펴봐야 한다. 설교는 독서에서 읽은 말씀을 우리의 상황으로 가져다 주는 길잡이이며, 뒤에 이어질 성찬의 전례에서 일어나는 신비를 비춘다. 그래서 설교는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를 잇는 다리이다.

성찬의 전례는 말씀 듣기와 설교라는 길잡이를 따라,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신비 사건을 우리 몸으로 경험하는 구체적인 행동이다. 성찬기도 안에서 우리는 말씀이신 하느님과 그리스도께서 성령과 함께 이루신 구원의 역사를 돌아보고, 영성체를 통해서 그 말씀을 먹고 마신다. 이것이 말씀과 성사의 관계이다. 현대 교회는 이제 “말씀은 성사를 비추고, 성사는 말씀을 구체화하여 우리 몸으로 느끼게 한다”는 고대 교회의 진리를 다시 깨닫고 있다.

우리는 함께 말씀을 먹어야 한다. 그리고 성사를 통해서 말씀을 몸으로 살아야 한다.


(성공회 신문 2011년 8월 13일치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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