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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시는 하느님 - 삼위일체와 전례 / 주낙현 신부
신장현 2016-07-09 추천 2 댓글 0 조회 3175

주낙현 신부와 함께 하는 전례 여행


춤추시는 하느님 - 삼위일체와 전례


삼위일체 교리는 지난 2천 년 교회 역사 동안 많은 신학자와 신앙인을 괴롭힌 신학 주제다. 내로라 하는 대학자들도 헷갈려서 많은 이단 논쟁이 여기서 나오곤 했다. 그러니 그 교리를 여전히 잘 설명하지 못하는 신학자, 성직자나, 잘 이해하지 못하는 신자라 해서 자기 머리를 쥐어박지 않아도 된다. 그렇다고 삼위일체 교리를 성서의 명확한 근거 없이 몇 사람들이 만들어 강요한 것이라고 내칠 수 없다. 그러기에는 하느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활동이 매우 다채롭고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노라고 성서와 교회가 증언하기 때문이다.

교리에 앞서 경험과 증언이 있었다. 난해한 삼위일체 교리가 확정되기 이전에 삼위일체의 행동이 먼저 있었다. 창조하시는 하느님, 성육신하시어 구원하시는 그리스도,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님의 활동이 먼저 있었다. 이 구원의 행동을 많은 초대 그리스도인이 경험하고 증언했다. 이를 다시 기억하고 새로운 상황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경험하며 물려주는 공간이 바로 전례였다. 이 경험을 좀 더 정교한 논리를 써서 교리로 만든 일은 나중 일이었다. 이 선후를 바꾸면 오해가 생긴다.

세례와 성찬례는 삼위일체의 행동을 되새겨 준다. 세례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선물처럼 주어진다. 이 삼위일체 이름이 있고 없음으로 세례가 유효한지 무효인지 판가름한다. 성찬기도의 절정은 막바지 삼위일체 영광송이다. “전능하신 하느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과 하나되어, 온갖 영예와 영광을 영원토록 받으시나이다.”

왜 세례와 성찬례는 이 삼위일체 이름을 고집하는가? 성찬기도 마침 영광송이 드러내듯이, 하느님과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나누는 관계 때문이다. 서로를 통해, 서로 함께, 서로 안에서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 하느님의 삶이다. 그러니 하나의 세례를 나눈 그리스도인들은 성찬례와 세상의 삶 속에서 이와 닮은 관계를 누리며 살아야 한다. 이런 공동체의 삶이 바로 삼위일체의 삶이다.

전례 공동체로 모인 신자들은 거듭해서 삼위일체 하느님을 예배한다. 전례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성령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해달라고 청원한다. 이 삼위일체의 전례가 우리를 공동체로 이끌며, 공동체의 신앙을 만들고, 이 신앙을 세상에 적용하며 살아가도록 인도한다. 이런 전례의 경험이 없으면 삼위일체는 우리 삶과는 무관하게 허공을 떠도는 난해한 교리가 된다.

다시 말해, 삼위일체는 교리로 설명할 이론이 아니라, 그 삶으로 드러나야 할 행동이다. 그 두 차원은 ‘함께 나누는 친교’(코이노니아)이며, ‘서로 뒤섞여 하나가 되는 춤’(페리코레시스)이다. 15세기 이콘 하나와 20세기 그림 하나는 이를 잘 보여준다.

<그림> 안드레이 류블레프 - 삼위일체
http://en.wikipedia.org/wiki/File:Angelsatmamre-trinity-rublev-1410.jpg

잘 알려진 15세기 러시아 삼위일체 이콘은 원래 낯선 나그네를 환대했던 아브라함 이야기(창세 18장)를 그린 것이다. 낯선 떠돌이를 극진하게 대접했던 아브라함은 이 세 손님이 친교를 누리는 시간과 장소를 마련했다. 이 친교의 현장이 바로 삼위일체 이콘이 되었다. 이 이콘을 설명하기보다는, 이것이 비추는 친밀한 교제를 응시하는 일이 먼저다.

<그림> 앙리 마티스 - 춤
http://en.wikipedia.org/wiki/File:Matissedance.jpg

20세기 초 화가 앙리 마티스는 ‘춤’이라는 그림을 그렸다. 옷을 입지 않은 여럿이 손을 맞잡고 원을 그리며 춤을 춘다. 어떤 이들은 나체는 우리가 태어난 삶의 본연이고, 서로 마주 잡은 손은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고, 원은 그들이 만든 공동체를 의미한다고 풀이한다. 그러나 춤을 추는 운동이 더 중요하다. 신앙은 뜻풀이가 아니라 행동이라는 말이다. 삼위일체는 춤추는 하느님이시며, 우리를 춤의 공동체가 되도록 부르신다.

삼위일체의 전례가 가진 이 두 가지 차원은 교회에 선교적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낯선 이들을 환대하는 공동체인가? 우리는 낯선 이들과 함께 손을 붙잡고 춤을 출 수 있는 공동체인가? 우리는 전례를 이런 삼위일체의 춤으로 만들 수 있는가?

이 질문과 씨름할 때, 레너드 코헨의 노래가 들린다.

“불타는 바이올린 선율과 당신의 아름다움에 맞추어, 나와 춤을 춰요. 내가 모든 두려움을 넘어서 평온으로 모여들 때까지, 나와 춤을 춰요. 당신의 손으로 나를 만지고, 사랑이 끝날 때까지, 나와 춤을 춰요. 사랑이 끝날 때까지, 나와 춤을 춰요.”

http://www.youtube.com/watch?v=1MsgJsin3p0


(성공회 신문 2011년 11월 26일자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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