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낙현 신부와 함께 하는 전례 여행
“우리에게 내리시는 영” - 전례와 성령
지난 20세기는 성령 운동의 시대라 할 만큼 성령의 활동에 대한 체험이 세계 교회 곳곳에서 남달랐다. 이 체험은 성령쇄신 운동, 은사(카리스마) 운동, 오순절 운동 등으로도 불린다. 이 체험은 신앙인의 뜨거운 내적인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신앙은 교리와 관습을 머리와 이성으로 이해하는데 머물지 않는다. 신앙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과 용서의 은총을 가슴과 몸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이런 각성과 주장이 널리 힘을 얻었다. 교회의 기존 관습과 구조에 변화를 일으켰고, 급속한 양적인 성장도 이끌었다.
성부 하느님의 높으신 위엄과 성자 예수님의 고통스러운 희생을 너무 강조했던 탓일까? 교회의 신학과 관습은 너무 무겁고 복잡하여 자신에게 닥친 신앙적 갈증을 풀어주지 못한다고들 느꼈다. 이런 와중에 마음의 상처를 감싸는 위로, 감정을 격하게 흔드는 힘을 체험한 이들은 그것이 성령 하느님의 활동이라고 증언했다. 이는 과연 그동안 교회 생활과 신학에서 잊혀진 성령 하느님을 재발견하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 운동들은 지금 몇 가지 질문과 씨름하고 있다. 성령 하느님 체험이 개인의 감정에 머문 나머지 공동체에는 무관심하지 않는가?(개인주의) 몇몇 특별한 은사만 강조하다가 다른 다양한 은사들은 무시하지 않는가?(은사의 차별) 지금의 강렬한 체험에만 의지하면서, 전례 안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변화를 오해하지 않는가?(전통과 전례의 약화).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 사건이 현재의 성령 체험과 무관한 것이 되지 않는가?(예수와 성령의 분리)
루가복음서가 전하는 예수님의 삶은 하느님의 영에 이끌린 삶이다. 예수님은 '영'으로 잉태했고, ‘영’에 이끌려 광야에 나가셨고, ‘영’의 내림을 받아 복음을 선포하셨으며, 십자가 위에서 그 ‘영’을 하느님께 되돌려 드리셨다. 마침내 그 ‘영의 몸’으로 부활하셨다. “주님의 영(프뉴마)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며,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루가 4:18) 이 ‘프뉴마’가 바로 예수의 삶 속에 녹아든 성령 하느님이시다.
교회의 전례 속에서 우리는 그 ‘영’에 이끌려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한다. 더불어, 그 ‘영’이 예배 공동체로 모인 우리 모두에게 내리기를 청원한다. 예수 기억(아남네시스)과 성령 청원(에피클레시스)이 성찬기도의 핵심이다. 이 둘이 함께하지 않으면 성찬기도는 불완전하고, 이 둘을 우리 의식과 몸과 행동에 새기지 않으면 예배는 완전해질 수 없다.
그렇다면, 완전한 예배 속에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물과 사람을 거룩하게 변화시키는 일이다. 그래서 성찬기도 전체는 축성기도이다. 이 축성은 이중으로 일어난다.
첫째, 성령께서는 빵과 포도주와 같은 세속적인 사물을 거룩하게 하신다. 우리가 창조 세계에서 땀 흘리고 수고하여 만들고 거둬들인 것을 거룩하게 하신다. 이로써 에덴동산의 타락 이후 저주와 징벌이었던 우리의 노동은 이제 거룩한 것이 된다. 우리가 봉헌한 하찮은 빵과 포도주는 이제 고귀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어 우리 생명을 살린다. 이 거룩한 변화는 이제 세상의 그 어떤 작은 사물도, 생명도, 생활도 고귀한 것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과 희망을 품게 한다.
둘째, 성령께서는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일치하게 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일찍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당부하셨다(레위 11:44-45; 1베드 1:16). 우리 힘만으로 그리할 수 없으니 성령께 우리를 거룩하게 해달라고 청원한다. 그러므로 축성기도는 봉헌한 예물만이 아니라, 예배에 참여한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의 거룩한 몸이 되도록 바치는 기도이다. 이때 거룩한 몸의 표지는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인 ‘우리’이다. 그래서 이 축성기도는 그리스도의 한 몸과 한 피를 나누는 하느님 백성의 일치를 위한 청원 기도이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몸으로 거룩하게 된 공동체 안에는 차별이 없다. 오직 기도를 통한 연대만이 있다.
성령은 바람처럼 마음대로 분다. 그 자유로운 성령을 우리 손아귀에 붙잡아 두고 ‘내 것’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지난 세기에 성령의 바람은 교회의 굳은 관습과 짓누르는 권위주의를 무너뜨리고 신앙의 활력을 교회에 불어넣었다. 그러나 지금, 같은 성령의 바람은 예수님의 삶을 이끄신 복음과 해방과 자유의 영을 우리 몸 안에 되살리라고 촉구한다. 세상의 질서와 세속적인 것을 업신여기지 말라고, 오히려 그 거룩한 가능성을 발견하라고, 우리 등을 떠민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로 분열된 우리의 신앙과 삶을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로 변화시키라고 부른다.
전례는 성령이 이끄시는 그 거룩한 변화의 체험 현장이다.
(성공회 신문 2011년 11월 12일자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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