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낙현 신부와 함께 하는 전례 여행
예배 전쟁? - 다시 생각하는 고교회와 저교회
우리 교회에서 말 많고 탈 많은 이야깃거리 하나는 예배이다. 예배가 대화의 주제가 된다면 전례적 교회로서는 좋은 일이다. 그런데 가만히 들춰보면 사정이 좀 다르다. 성공회 예배는 엄숙하긴 한데, 음악 콘서트나 열탕 같은 열기가 부족하다고 말하는가 하면, 적당한 온기로 온몸을 감싸는 찜질방 같은 맛을 즐기는 게 낫노라는 말도 있다. 모두 일리가 있다. 성공회 예배는 뜨겁고 열정적인가 하면, 엄숙하고 절제된 맛을 건네주기도 한다. 신자 개인과 교회 공동체, 성직자에 따라서 그 맛을 경험하고 느끼는 기대와 방법이 다양하다. 그러나 예배에 대한 생각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우리의 취향이 아니라, 예배를 이끌고 주도하시는 하느님이다.
한편, 식견이 좀 있다는 이들은 종종 한국 성공회의 전례가 ‘고(高)교회’ 일색이어서 문제이고, 그동안 소개되지 않은 개신교 풍의 ‘저(低)교회’ 예배를 받아들여야 한다고들 한다. 반발도 만만치 않다. 저교회 예배는 예배로서 풍모가 없을뿐더러, 요즘은 개신교마저도 성공회의 고교회적인 예배를 모범으로 새롭게 발견하는 처지라고 반박한다. 그런데 이런 구분과 주장이 옳은가? 적어도 이런 용어가 어디서 나왔고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 살펴야 한다.
‘고교회’나 ‘저교회’라는 용어가 꼭 옳은 표현은 아니다. 성공회 안에 그런 ‘교회’들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런 태도를 보인 ‘신자들’이 있었다. 즉 ‘고교회파 신자들’(high churchmen)과 ‘저교회파 신자들’(low churchmen)이 더 나은 표현이다. 또 이런 표현도 ‘영국’ 성공회의 특정한 역사적 시기와 상황에서 나와 다양하게 발전했다. 게다가 성공회는 영국을 넘어서 세계로 발전하고, 지난 20세기에는 ‘전례 운동’이라는 거대한 전례 쇄신 운동을 겪지 않았던가? 그러니 오늘날 우리 교회의 전례를 두고 적용하려면 훨씬 조심해야 한다.
‘고교회파 신자들’은 17세기 영국 교회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애쓴 성직자와 신자들 무리이다. 이들은 영국 교회가 오랜 공교회 전통에 근거하고 있으며, 국가와 교회, 주교직, 전례와 성사들의 권위에 높은(high) 신적인 기원이 있다고 보았다. 19세기의 ‘옥스퍼드 운동’은 이들과는 여러모로 생각이 달랐지만, 교회의 전통과 전례에 대한 강조에서는 비슷한 생각을 이어갔다. 그러나 이들은 눈에 보이는 전례의 행동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성찬례를 전례의 중심으로 여겼지만, 그 실천과 변화는 보잘 것 없었다. 오히려 중세 초기 전통을 받아들여서 전례 행동을 장엄하게 꾸민 이들은 후대의 ‘의례주의자들’이었다.
한편, ‘저교회파 신자들’은 국교인 영국 성공회 내의 사람들과 국교 자체를 반대하던 사람들(비국교도)을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이들은 제도적 교회와 성직, 성사의 권위를 낮게(low) 보려 했다. 이런 흐름은 나중에 소위 성공회 ‘복음주의자들’과도 연결되지만, 그것도 전부는 아니다. 오히려 영국 교회 다수를 차지하던 ‘자유파 신자들’이 저교회파였기 때문이다. 이들 역시 예배를 신앙생활의 중심으로 여겼지만, 그 주일 예배 형태는 대체로 ‘아침기도식 예배’였다.
고교회파와 저교회파를 딱히 구분하기도 어렵다. 그 안에는 상반되는 다양한 목소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존과 찰스 웨슬리 형제는 전형적인 ‘고교회파’ 출신으로 복음주의 운동을 일으켰고, 헨리 뉴먼은 전형적인 ‘저교회파’ 출신으로 ‘옥스퍼드 운동’을 일으켰다가 천주교로 넘어가지 가지 않았던가?
특히 오늘날에는 ‘고교회냐, 저교회냐’라는 구분이 적절하지 않은 이유가 또 있다. 지난 회에 살핀 것처럼, 지금의 세계 성공회와 그리스도교 전반의 예배 생활에 영향을 끼친 ‘전례 운동’ 때문이다. 16세기 종교개혁이 1차 종교개혁이었다면, 20세기 교회 일치 운동과 전례 쇄신 운동은 2차 종교개혁이라 할만하다. 그 의도와는 관계없이 16세기의 개혁이 교회와 성사에 대한 이해의 분열을 낳았다면, 20세기의 개혁은 교회의 공통 유산에 대한 재발견과 그에 근거한 새로운 대화와 이해를 찾았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고교회 대(對) 저교회’라는 낡은 틀로 대결할 때가 아니라는 말이다.
굳이 구분이 필요하다면, 성공회 전통과 20세기 전례 운동의 성과를 함께 받아들여서, ‘전례적 교회’와 ‘비전례적 교회’로 나눌 수 있겠다. 다시 말해, 성찬례를 예배 생활의 중심으로 삼는 교회는 전례적 교회요, 그렇지 않은 교회는 비전례적 교회라 할 수 있다. 전례 행동과 실천에서 보이는 겉모습의 ‘스타일’은 교회 공동체에 따라 다양할 수 있고, 그 다양성은 오히려 격려할 일이다. 다만, 여전히 좁은 해석으로 특정한 신학적 입장을 연결하여 파벌을 떠올리는 주장과 남들을 모방한 스타일은 빗나간 일이기 쉽다. 그참에 하느님께서 이루신 구원의 역사를 기억하고 감사하며 축하하러 모인 예배는 사람들의 예배 전쟁 수단이 될 위험이 있다.
(성공회 신문 2011년 7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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